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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여행/호주

42일간의 호주 배낭여행 에필로그, 떠나온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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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오페라 하우스

쇼핑몰이 실패하고 좌절하고 도망치듯 떠나온 이곳. 처절하게 현실도피가 필요했던 1년 전의 나. 다양한 일자리를 거치며 10개월을 넘게 개미처럼 일했고 여행을 떠났다. 여행 중 나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어지간해서는 외로움의 외자도 몰랐던 나였지만 지독히도 외로웠다. 친구를 만나기 위한 여행도 아니요, 현지인과 소통하기 위한 여행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기에 적절한 나라도 아니었다. 사람 냄새는 덜 나지만 확실하게 혼자가 되어 나만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여행이었다. 외톨이가 되어서 오로지 나만 생각하고, 나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여행 내내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그런 여행. 어쩌면 처음 하는 해외여행을 (그것도 짧지 않은 기간의) 호주라는 선진국을 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얼리 비치

크고 넓은 호주 땅은 쓸쓸하고 외롭고 고독했고 차갑고 냉정했다. 맛있는 밥을 같이 먹을 이가 없었고, 아름다운 광경들을 함께 볼 이가 없었고, 오순도순 수다를 나눌 이도 없었고,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거나 어깨동무를 할 수 있는 살의 온기도 없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늘 나에게는, 늘 내 옆에는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나 자신. 나 자신과 맛있는 밥을 먹었고, 나 자신과 멋진 풍경을 보았으며, 하릴없이 버스를 타고 갈 때는 머릿속에는 서로 자기주장하는 수만 명의 내가 있었다. 나 자신의 손을 어루만지며 온기를 느꼈고. 그리고 깨달았다. 혼자 떠난 여행이 아니라 나와 함께 떠나 온 여행이었음을. 여행 내내 나는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나는 나 자신과 함께 여행을 하고 있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고 하기 싫은지, 이 넓은 땅을 버스로 이동하면서 어떤 디지털 문명도 닿지 않는 곳에서 남아도는 게 시간일 때 나는 그 기나긴 시간을 나와 수다 떨며 보냈다. 그 어떤 사람도 아닌 나를 만나고 온 여행이었다.

로트네스트 아일랜드

혼자였지만 나는 언제든지 나와 함께 행복할 수 있었고 즐거울 수 있었다. 나와 함께 했던 여행은 모든 것이 다 나를 위한 맞춤 여행이었다.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고, 가기 싫으면 안 가면 그만이고, 이도 저도 아니면 숙소에서 뒹굴 거리면서 쉬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가장 큰 장점은 오로지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내가 어떤 감정이고 어떤 상태인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할 시간이 많아진다는 것. 정신없는 일상에서는 하기 힘든, 오로지 여행을 통해서만 가질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시간이었다.

브룸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젊을 때 떠나라고. 여행할 수 있다면 모두가 청춘이라고. 아직 떠나지 않은 사람들은 말한다. 여행을 왜 가는 거냐고, 혼자 가면 무섭지 않냐고, 대체 무엇을 얻을 수 있어서 가는 거냐고. 심지어 혹자는 시집이나 가지, 네 나이에 대책 없이 뭐 하는 거냐며 독설을 날리기도 한다. 하지만 직접 가보지 않는 한은 절대 알 수가 없다. 모르면 의자에 앉아서 묻는 것보다 직접 떠나보는 게 빠르다. 여행에 일괄적인 이유는 없다. 여행을 하는 자신만의 이유가 존재할 뿐이다. 자신만의 각기 다른 수천만의 이유가. 나는 여행기간 동안 무엇을 얻었느냐고 자문해본다면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저질체력에 몸집도 작은 여자가 제 몸만 한 캐리어를 끌고 적어도 42일간의 여행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브룸

나는 세계여행을 하지 않았다. 단 하나의 나라, 단 하나의 대륙, 호주라는 곳만을 여행했을 뿐인데도 내가 얼마나 좁은 곳에만 있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기대했던 것보다 실망한 것도 많고 생각한 것보다 좋았던 것들도 많았다. 사진에서만 보고 풍문으로만 듣던 것들은 내가 직접 보기 전까지는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전 세계를 여행하고 나면 이보다 더 무시무시한 느낌이겠지. 인근에 근접해 있는 아시아 나라 몇 개를 왔다 갔다 하는 정도로 넓었던 호주 땅. 오대양 육대주 중 하나의 대륙을 정복했다는 뿌듯함을 감출 길이 없다.

다른 누군가처럼 많은 나라를 여행하지도 않았고, 적은 금액으로 버티고 버티는 여행을 하지도 않았다. 물론 최대한 아끼려고는 했지만. 내가 호주 여행으로 쓴 비용이 누군가에겐 가난한 세계여행을 할 수도 있는 비용이라고 말하겠지만, 내가 정의하는 세계 일주는 유럽 몇 개국, 아시아 몇 개국, 미주나 아프리카 땅 몇 개를 돌고 온 여행이 아니라 지구 상에 내가 갈 수 있는 모든 나라를 방문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내가 추구하는 그리고 내가 앞으로 꿈꾸는 진짜 세계일주다(50년간의 세계 일주를 했던 앨버트 포델처럼). 아, 물론 전자에서 말한 식으로 다녀오신 분들을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나보다 더 훌륭하고 멋진 시간을 보내신 분들이므로. 다만 내가 생각하는 세계일주의 의미 차이가 있을 뿐임을 말하고 싶다. 

케언즈

호주 여행을 하면서 이미 다른 곳으로의 여행을 계획하고 있던 나는, 어떤 기쁨이 날 기다리고 있을지 설레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에서의 내일은 늘 내가 알던 오늘의 반복이었다. 새로울 것 없는 똑같은 하루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여행하는 42일만큼은 내일은 또 어떤 일이, 어떤 상황이, 어떤 감정과 기분이 날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기대감에 설레는 하루하루였다. 똑같은 하루가 아닌 단 5분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새로움의 연속. 여행처럼 온몸의 세포 감각을 깨우는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금 결심이 굳어졌다. 또 떠나야지.

하버 브릿지

나를 찾아 도망쳐 온 호주에서의 여행은 이렇게 끝이 났다. 누군가가 나를 찾았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답을 얘기하자면 찾았다. 한국에 가면 난 여전히 미래가 깜깜하고 변변찮은 직업도 없고 모아둔 돈도 별로 없고 아무 대책도 없이 나이만 한 살 더 먹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다만 바뀐 것은 내 처지가 아닌 마음이다. 절망에 빠져 뭘 해야 할지조차 몰랐던 1년 전과는 달리 지금의 나는 배우고 싶고 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아져서 오히려 고민이다. 조금 더 탄탄해진 경험들과 적어도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과 배우고 싶은 수많은 일들을 찾아냈다. 물론 당장은 실현 불가능이지만 미래를 위한 소박한 꿈들까지. 그리고 나를 찾는 여행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고 미래에도 나는 여전히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고 무엇이든지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본 호주 여행기는 2016년의 정보들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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