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의 숙박 동안 별을 보며 잠들고 별을 보며 일어났지만 오늘은 해를 보며 일어났다. 부시 캠프장을 정리하고 다시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시드가 틀어놓은 노래에서 영맨만 나오면 그렇게 YMCA를 외쳐댄다. 센스 있는 시드는 인디아나 존스의 OST와 라이온 킹 OST인 아 그랬냐 발발이 치와와까지 나오는 걸 보면 역시 음악에는 어떠한 국경도 편견도 없는 것 같다. 지루한 여행길에 즐거움을 더해주었다.
도로를 달리던 와중 캥거루가 나온다는 표지판을 보고는 멈춰 섰지만 볼 수 없었다. 다시 차에 올라 10분가량을 달렸을 때쯤 로드 킬로 추정되는 캥거루 한 마리가 도로 한복판에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네가 살아있는 모습이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시드는 캥거루를 도로 옆 풀숲으로 옮겨놓고는 다시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앨리스 스프링스를 떠난 지 3박 4일 만에 드디어 마을다운 마을을 만났다. 오늘의 목적지는 오팔의 도시, 쿠버 페디였다. 오팔 그 하나만으로 황량한 사막 위에 지어진 도시. 그 분위기는 마치 서부영화에 나오는 뒷배경으로 완벽한, 딱 그런 모습이었다. 어디선가 허리춤에 총을 꽂고 멋진 모자를 쓰고 말을 탄 카우보이가 나타날 것만 같았다. 영화 매드 맥스도 호주에서 촬영한 부분이 있던데 여기도 왔었을까?
오늘은 부시 캠프장이 아닌 쿠버 피디의 유명한 지하 숙소, 벙커 하우스에서 잠을 청한다. 침대 옆에 콘센트도 있고 지붕도 있다. 오지 여행 한지 얼마나 됐다고 콘센트만 있어도 신세계로 느껴졌다. 잠시 슈퍼마켓에 들러 시드는 식료품을 사고 우리는 늘 그렇듯 각자의 주류를 챙겼다.
다시 차를 타고 어느 한 상점 앞에 정차했다. 이곳에서는 애버리진의 아트, 오팔 장신구들, 그리고 캥거루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상점 안에 뒷문을 통해 들어가면 우리들은 손에 캥거루 간식을 놓고 그들을 기다린다. 멀리서 진짜 TV에서 보던 것처럼 총. 총. 총. 하고 뛰어온다. 호주 와서 약 1년 만에 처음으로 살아있는 캥거루를 봤다. 널리고 널린 게 캥거루에다가 현재는 번식수가 너무 어마어마해서 문제라고까지 하는데 말이다. 약간 눈이 풀린 듯 보이는 캥거루들은 손에 있는 간식을 야금야금 주워 먹었다. 간식 없이 손을 뻗으면 확인해보고는 바로 무시하고 돌아서는 똑똑하고 냉정한 녀석들이었다.
주인아저씨는 캥거루 새끼를 데려와 분유같이 보이는 것을 먹이기 시작했다. 아저씨 품에 꼭 안겨 맛있게 먹고는 우리들 보라며 바닥에 풀어주었지만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무서운지 아저씨 다리에 엉겨서 안아달라고 보채는 듯했다. 아직 바깥세상에 나오기엔 너무 어려 보였는데, 구경거리가 된 아기 캥거루가 어쩐지 측은해 보였다.
한참 다들 아기 캥거루에 관심을 쏟고 있는 찰나 내 눈에는 더 측은해 보이는 새 한 마리가 들어왔다. 이곳에서 보호해주고 있는 건지 다리 한 짝이 완전히 반대로 꺾여버린 작은 새였다. 시드가 먹이를 주자 끽끽 대면서 힘겹게 받아먹었다. 캥거루보다 이 작은 새한테 더 눈길이 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캥거루 구경을 마치고 지하교회를 보러 갔다. 아주 작은 이 교회는 내 눈에는 그다지 특별할 게 없어 보였다. 쿠버 페디는 무척이나 더운 사막이기에 지하 건축이 발달했다고 한다. 예전에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지하에 사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게 이곳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나라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가는 길 중간에 모래가 잔뜩 쌓여 있는 곳에서 오팔 찾기가 시작되었다. 물론 이미 다 파낸 모래이기 때문에 근거는 없겠지만 진짜 쌀알만 한 게 간혹 있긴 한가보다. 나는 잠깐 찾다가 차로 돌아와서 오팔을 찾는 일행들을 지켜보았다. 찾을 확률도 거의 없는 저 땡볕에 나가기가 무척이나 싫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참 하기 싫은 일이나 관심 없는 분야에는 아웃 오브 안중이 심하구나를 새삼 깨닫곤 한다. (사회생활 참 못하는 타입ㅎㅎㅎㅎ)
다시 차에 올라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 바로 앞에 관광지로 만들어놓은 오팔 광산&박물관이 있었고 그곳이 오늘의 메인 관광이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라 이곳저곳을 둘러볼 수 있었다. 한 30분가량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광산을 구경하고 비디오를 시청하러 가는데 그 비디오가 참 재밌었다. 가이드 언니의 설명은 사실 반의반도 못 알아들었는데 비디오는 좀 더 나았다. 오팔의 역사를 설명해주는 영상이었는데 재연배우들의 연기가 진짜 웃겼고 그에 반해 성우의 목소리는 너무나 진지했다. 꽤나 흥미로운 영상이었고 내용 파악도 어렵지 않았지만 자막이 지원됐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웠다.
예전에 오팔을 채굴하던 광산을 보존해 놓은 곳들과 거처들, 영상관람실 그리고 입구 쪽에는 오팔로 만든 각종 액세서리들이 휘황찬란하게 전시되어있었다. 빨간색이 들어간 오팔이 품질이 좋다고 하던데 쭉 둘러보다 가격을 보고 기겁할 뻔했다. 저렴한 것은 몇 만 원대에서 몇 십만 원대로 오팔이 그만큼 작게 들어가 있지만 큼직한 건 몇 백만 원에서 몇 천만 원을 호가한다. 오팔이 이렇게 비싼 건지 처음 알았다.
숙소로 돌아와 일몰도 보고 씻기도 하고 개인 시간을 보내다 저녁으로는 피자를 먹었다. 역시 밀가루였지만 그래도 피자는 맛있다. 우리는 테이블에 앉아 또다시 하나, 둘 맥주를 꺼내오고 시드가 만들어준 게임 판으로 게임을 시작했다. 여기서 참 새로운 게임을 많이 배워가는 것 같다.
이번에는 포커 카드를 이용한 게임으로 2부터 J, Q, K, A 그리고 조커까지 숫자마다 벌칙을 써놓은 것이다. 둥그렇게 앉아 순서대로 카드를 하나씩 뽑아간다. 2가 나오면 지목하는 사람이 한입 마시고 3이 나오면 내가 마시고 4가 나오면 친구랑 같이 마시고.. 이런 식으로 하는데 참 재밌다. 단어 라임 맞추기도 있었고 카테고리를 정해 해당되는 단어를 말해야 하는 것도 있었고 여러 가지였는데 무엇보다 웃겼던 건 조커를 뽑으면 룰을 만들 수 있는 거였는데 한 명이 drink(마시다)라는 단어를 이야기하면 머리를 테이블에 대고 엎드려있어야 했다. 글로 쓰니 그다지 안 재밌어 보이지만 할 때는 정말 재밌었다.
깔깔대며 게임을 이어나가는데 일본 남자애가 아까부터 뭔가 허세스럽게 벌컥벌컥 들이켜더니 좀 취한 것 같아 보였다. 왔다 갔다 하다가 바닥에 넘어지고 대자로 엎어지더니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외치면서 고릴라 흉내, 폴 댄스 흉내 등을 외치니 신나서 그대로 따라 하곤 했다. 어쩐지 그가 자꾸 놀림감이 되는 것 같아 껄끄러웠지만 정작 당사자는 모두의 관심을 받아 행복해 보이긴 했으니 상관없으려나 했지만.
거기까진 그렇다 쳐도 그 이후에는 더 취해서 계속 뻐큐를 외쳐대고 남산만 한 자신의 배를 까뒤집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유흥가 체험을 자랑스럽다는 듯이 신나서 설명했다. 젠틀맨 클럽이라는 곳에 가면 여자들이 있고 옆에 앉아서 술을 따라주며 이야기하고 같이 샤워를 하고 침대를 간다며 어찌나 상세하게 설명하던지. 심지어는 유사 성행위를 흉내 내며 춤을 추기까지. 사람들은 웃고 즐거워했지만(내 눈에는 무시하고 놀리는 것 같아 보였지만 진실은 알 수 없다.) 불쾌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게임할 때까지만 해도 즐거운 밤이었는데, 그리 보기 좋은 행동은 아니었던지라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기분이 영 좋지만은 않은 밤이었다.
<본 호주 여행기는 2016년의 정보들임을 알려드립니다.>